[프란시스 하] 청춘이란 상실의 시대

눈물이 났는네, 왜 났는지 잘 모르겠는 영화
청춘이 금세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적인 말도 가혹한 현실앞에서는 무너져버릴수 있다는걸 알면서 다시 믿어보려 하는 이유는 뭘까.
프란시스 처럼 아직까지 청춘의 무게가 나의 삶에 깊게 뿌리내리고 의지할 만큼 무겁지 않기 때문에 매우 불안정한 시간들을 보낸다. 어느 것 하나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신세이면서 말이다. 그럴것 같아-하는 식으로 타인에게 나의 근황을 말하고 있는 내 모습은 마치 프란시스가 툭하면 “I guess”라는 말을 덧붙이며 그 가벼움과 불확실성을 증명하는 모습 같았다. 지루함이라고 생각하는 일상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그만큼 가볍기에 아직 잘 흔들리고 있기 때문인것 같다.

"That is your person in this life." (Greta Gerwig as Frances)
내 것이지만 남이 더 많이 쓰는 이름 따위 접어버리면 그 만, 내 세상에서 어깨 쫙 펴고 살자
이러한 무기력 속에 지배 당하면서도 세금환급을 보고 활짝 웃던 모습이 마치 계산적으로 살고 싶지 않으면서도 어쩔수없이 그 수들을 헤아리고 그에 버겁게 살아가고 있는 상반된 내 모습이 떠오른다.
또한 머릿속에 맴도는 찬란한 미래의 순간들은 도무지 현실로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직업적으로 성공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루하루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 그저 환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현실을 비집고 들어오는 모든 영화속 장면은 경쾌한 노랫소리가 아픔을 대변해 눈물이 나게 했다.

학위를 따내고,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 어떤 큰 성과를 내는 이뤄내고 싶은 꿈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초조한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짊어지기에 아직 나의 청춘은 너무나도 가볍다. 영화에서도 청춘은 사랑에 대한 낭만과 친구에 대한 믿음, 성공적인 앞날에 대한 희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버린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청춘이 그렇듯, 그들 역시 여기저기 흩어져버린 그들만의 것 낭만, 사랑, 꿈을 되찾으려 발버둥치며 살아간다.

비로소 흑백영화의 진가를 제대로 알았다. 이 영화는 흑백처리를 함으로써 특수성을 제하고 보편성을 얻고 있다. 프란시스만의 이야기가 아닌 나, 우리, 가장 보통의 존재의 이야기에 대해서 나는 가장 보통의 청춘이구나를 실감하게 해준다. 내 일상속에서도 월급이 들어오는 순간에도 다음달 지출된 돈을 생각하며 주눅들고, 꾸준하지 못함에 진실된 인간관계를 구축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고, 한결같이 고수한 내 꿈이 별것이 아니었다는 사실들이 영화와 내현실은 별반 다를게 없다는걸 느끼게 한다.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은 내 주변의 사람들, 나의 젊음, 나의 꿈 그리고 나의 청춘을 앗아간다. 우리는 애써 그것들을 붙잡으려 맨발로 뛰어나가보지만 빠르게 지나쳐버리는 시간에 비해 나의 능력은 터무니 없이 굼뜨다.
청춘의 시기에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늘 똑같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생계를 이어나갈 방안을 찾을 것인지, 꿈이라는 것을 한번 믿어보고 밀어붙여볼 것인지. 둘 사이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서 딱히 하는 일 없이 청춘을 낭비하고 방황하는 우리의 모습은 프란시스에게 그대로 녹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건, 곧 내 삶을 열렬히 사랑 하는 일, 나아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용기있게 사랑하는 길이라는 것.

여유를 되찾고 불확실한 것들로부터 하나씩 벗어나게 될 때 비로소 청춘의 끝자락으로 향해 간다는 것이, 청춘은 늘 혼란의 동의어라는 것이,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도 찬란한 순간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불안정하고 고독한 상실의 시대라는 점이 한편으로는 억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청춘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작정 직진하는 젊음이라는 기차에 타고 있는 난 살다보면 선로변경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달리고 있는 이상 그 선로변경은 전혀 우울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하는 나의 20대를 반추해보는 영화였다.
무조건 고집만 피우는 게 아닌 구부릴 줄 아는 게 진짜 어른인걸까